우리가 끝내 묻지 않는 단 하나의 질문: 성장
- KEEHO PARK
- 11월 18일
- 4분 분량
최종 수정일: 1일 전

지속가능한 ‘성장’은 가능한가
기술 · 재생에너지·ESG로는 풀리지 않는 질문들
“증가하지, 감소하지는 않습니다.”
기후 위기, ESG, 넷제로를 이야기하는 거의 모든 문장을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탄소 배출은 줄여야 하지만, 경제성장은 계속되어야 한다.”
탄소는 줄여야 하지만, 생산과 소비, 자원 사용의 총량은 “증가하지, 감소하지는 않습니다.”
과연 이 전제를 건드리지 않은 채, 우리는 위기를 풀 수 있을까요?
이 글은 그 질문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열역학이 말해주는 것: 되돌릴 수 없는 변화
모든 에너지는 보존됩니다. 이것이 열역학 제1법칙입니다.하지만 동시에, 모든 과정에서 엔트로피, 즉 무질서도는 증가합니다. 이것이 제2법칙입니다.
쉽게 말해,
에너지는 형태를 바꾸며 계속 남아 있지만
한 번 진행된 변화는 완전히 되돌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깨진 그릇을 떠올려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우리는 깨진 조각을 다시 붙일 수는 있지만, 깨지기 이전의 상태로 100%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기후 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탄소 포집 기술, 대규모 복원 프로젝트, 각종 ‘녹색 기술’이 등장해도 지구가 “산업혁명 이전의 깨끗한 상태”로 돌아가는 일은 없습니다.
질문은 단순합니다.“기술로 다시 원상 복구할 수 없다는 전제를 인정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얼마나 덜 바꾸고, 덜 깨뜨릴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는가?”
재생 에너지와 기후 기술, 무엇이 빠져 있는가
오늘날의 기후 담론에는 익숙한 해법이 있습니다.
재생에너지 확대
차세대 원전, 핵융합
탄소 포집·저장(CCS)
제로탄소 시멘트, 저탄소 철강…
기술 혁신이 기후 위기의 주된 해결책이라는 믿음, 이를 흔히 기술 행동주의(techno-solutionism) 라고 부릅니다.
가령, 이런 상상을 해보겠습니다.
지금 에너지 소비 총량이 200이라고 할 때
그중 100은 화석 연료, 100은 재생 에너지라고 가정해봅니다.
시간이 흘러 경제가 성장해 총 에너지 소비가 400이 되면,
기존의 화석 연료 100을 재생 에너지로 교체해야 할 뿐만 아니라,
성장으로 인해 새로 늘어난 200의 에너지까지 모두 공급해야 합니다.
겉으로 보면, “재생 에너지 비중 확대”라는 명목 아래 그래프는 점점 더 ‘친환경적인 색’으로 채워집니다.
하지만 다시 물어야 합니다.
태양광·풍력 설비를 깔기 위해 얼마나 많은 토지와 광물이 필요한가?
그 설비를 만들고, 운반하고, 유지·보수하는 과정에서 또 얼마나 많은 자원과 에너지가 드는가?
무엇보다, 그렇게 늘어난 에너지가 다시 추가적인 생산·추가적인 소비·추가적인 추출을 자극하지 않는가?
결국 핵심은 이 한 줄로 요약됩니다.
문제는 ‘에너지의 종류’만이 아니라,‘에너지와 물질 사용의 총량’입니다.
3, 지구는 몇 개가 필요한가: 지구 한계선과 생태 발자국
기후 위기를 말할 때, 우리는 거의 자동으로 “탄소”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지구 시스템 연구자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탄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해왔습니다.
3-1. 지구 위험 한계선(Planetary Boundaries)
스톡홀름 복원력센터는지구가 안정적으로 인간 사회를 지탱할 수 있는 한계를아홉 가지 시스템으로 나누어 제시합니다.
기후변화
생물다양성 손실
토지 이용
담수 사용
질소·인 순환
해양 산성화
대기 에어로졸
오존층
화학물질 오염 등
기후(탄소)는 그중 하나일 뿐입니다. 이미 여러 항목에서 한계를 넘어섰다는 경고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3-2. 생태발자국(Ecological Footprint)
생태발자국은 인간이 사용하는 자원과 배출하는 폐기물을 흡수하기 위해 필요한 생태계 면적을 뜻합니다.
지금 전 세계 인구의 상당수는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대로 계속 살려면“지구가 여러 개 더 필요하다”는 상태에서 살고 있습니다.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한국인의 생활 방식을 그대로 유지한다고 가정하면, 현재의 생태 용량으로는 지구 3개가 넘게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논의는 종종 이렇게 흘러갑니다.
“기후 위기가 심각하다 → 온실가스를 줄여야 한다 → 재생 에너지를 확대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빠진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는 생태 발자국의 크기 자체를 줄이려 하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색깔만 조금 바꾸고 있는가?”
탄소 감축·재생에너지 확대는 필요하지만, 그 자체가 총량 문제의 해법이 되지는 않습니다.
4. 거대한 가속(Great Acceleration)과 추출적 성장
1950년 이후 인류의 활동을 여러 지표로 그려보면,그래프는 거의 모두 하나의 모양을 띱니다.아래에서 위로 치솟는, 롤러코스터 같은 곡선입니다.
인구
GDP
에너지 사용량
자원 추출량
교통량
도시 면적…
우리는 이를 ‘거대한 가속(Great Acceleration)’이라고 부릅니다.
자원 추출량만 봐도 그렇습니다.
1970년 전 세계 자원 추출량이 310억 톤이었다면,
최근에는 1,000억 톤을 훌쩍 넘었습니다.
인구 증가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1인당 자원 사용량이 크게 늘어난 것입니다.
석유를 예로 들어보면 더욱 극적입니다.
석유가 자연 속에서 만들어지는 데는 수천만~수억 년이 걸리지만,
인류는 불과 200~300년 만에지각에 쌓여 있던 석유를 대부분 파내고 태워버리는 속도로 움직입니다.
이 현실은 불편한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지금 우리가 “성장”이라고 부르는 것의 상당 부분은 “더 많이 캐고, 더 많이 태우고, 더 많이 버리는 능력이 커진 것"에 가깝습니다.
이런 시스템을 흔히 추출적 자본주의(Extractive Capitalism)라고 부릅니다.
문제는, 이 구조 안에서 ‘지속 가능한 성장’이라는 표현이 과연 얼마나 성립 가능한 이야기인가 하는 점입니다.
5. ESG와 ‘지속 가능한 성장’이라는 전제
오늘날 ESG 담론을 정리해보면, 이런 흐름이 보입니다.
기업/기관은 넷제로를 선언하고,
재생에너지 사용량을 늘리고,
친환경 기술에 투자하고,
투자자는 이를 평가하고, 자본 흐름을 바꾸려 합니다.
프레젠테이션의 마지막 슬라이드에는 대개 이런 문장이 놓여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루겠습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이 말 속에는 매우 강력한 전제가 숨어 있습니다.
성장은 계속되어야 한다.
다만 그 성장을 ‘친환경적’으로 만들면 된다.
기술·재생에너지·ESG 경영을 통해 그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만약,
성장 그 자체가 자원 추출과 생태계 파괴를 동반하는 구조라면,
지구의 여러 시스템이 이미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면,
우리는 질문을 바꿔야 할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성장할 것인가?”에서 “얼마까지, 무엇을, 무엇을 희생하지 않고 성장할 수 있는가?”로.
지금의 ESG는 대체로 첫 번째 질문에 머물러 있습니다. 기술과 자본의 힘으로 문제를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만 만들려 합니다. 하지만 행성의 한계라는 관점에서는, 이 접근은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아닐 수 있습니다.
6. 그럼 무엇을 바꿔야 하는가: 성장 대신 기준을 바꾸기
여기까지 읽은 분들은 이렇게 질문하실 겁니다.“좋다, 다 알겠다. 그럼 대안은 무엇인가?”
아직 완성된 해답은 없습니다.다만 방향을 가리키는 몇 가지 기준은 분명해 보입니다.
6-1. 총량을 보는 ESG
에너지 믹스뿐 아니라,에너지·자원 사용의 총량 목표를 함께 세우는 것.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비중 50%” 같은 목표뿐 아니라,“동 기간 에너지 총 소비량 50% 감축”,“자원 투입 대비 산출 효율 50% 개선” 같은 절대량 지표를 ESG에 포함하는 것.
6-2. 더 많이가 아니라, 덜 쓰게 만드는 기술
더 많이 생산하고 소비하게 하는 기술이 아니라,오래 쓰고, 돌려 쓰고, 덜 쓰게 만드는 기술에 집중해야 합니다.
제품 수명 연장 설계
공유·대여 시스템
재제조·수리 산업
순환경제 인프라 등
기술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기술이 어떤 방향의 총량 변화를 만드는지가 핵심입니다.
6-3. 성장 대신 번영, 속도 대신 안정
마지막으로,우리가 측정하는 성과의 기준 자체를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GDP 증가율 대신,
생태계 안정성,
불평등 완화,
건강과 돌봄,
공동체의 회복력을 성과로 삼는 지표 체계가 필요합니다.
성장을 포기하자는 얘기가 아닙니다.무엇을 키우고, 무엇을 멈추고, 어디서 속도를 줄여야 하는지를 행성의 한계 안에서 다시 설계하자는 제안입니다.
맺으며: 넷제로를 넘어서, 다음 질문으로
재생에너지, 기후 기술, ESG는 모두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아직 한 번도 “성장”이라는 전제를 내려놓은 상태에서 지속가능성을 진지하게 논의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제는 질문을 바꿔볼 때입니다.
“어떻게 성장할 것인가?”에서
“언제까지, 무엇을, 무엇을 지키면서 성장할 것인가?”로.
그리고 언젠가는,“성장이 멈춰도 괜찮은 사회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로.
“증가하지, 감소하지는 않습니다.” 이 문장을 당연한 전제가 아니라, 다시 질문해야 할 문장으로 놓고 보는 것.
지속가능성을 둘러싼 우리의 대화는 그 질문에서부터 새롭게 시작될지 모릅니다.
나은미래플랫폼 주식회사 대표 컨설턴트 박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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